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문단 편집) == 평양 도착 == 오후 7시 20분경 요도호는 평양의 [[미림공항|미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미 해가 진 후였는데 미림 비행장에 유도등 등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서 요도호 기장이 예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야간 특공 항공대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착륙 후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범인들은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는데 범인들이 소지한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다는 것이 이후에 알려졌다.[* 이때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했다면 사건이 해결됐을 거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애초에 테러리스트가 장난감 무기를 들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당시 일본 정부가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말마따나 무력진압하려고 했으면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을 때 진압했을 것이다.] 요도호에 타고 있던 범인 9명, 승무원 3명,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 총 13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었다. 한편 서울 김포공항에서 해방된 99명의 승객들은 일본항공 특별기 DC-8-62(JA8040)[* 안타깝게도 1972년 11월 28일 코펜하겐 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국제공항]]으로 가는 446편으로 운항 중 중간 경유지였던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다가 실속하여 추락해 탑승객 76명 중 62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내 파괴되었다.]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NHK]]가 오후 7시 반에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는 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들을 뺀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곧 말을 바꾸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 발 물러나 꼬리를 내린 [[북한]]은 다시 "인도주의적 관점에 따라 승무원과 기체의 송환을 행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다음 날 범인들을 제외하고 조종사 3명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요도호를 타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에 주모자 등 3명이 사망하고[* 항간에는 이들 중 몇몇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기도 하는데 몇몇 사망자는 북한에 적응을 못 해서 나중에는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 보내져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16세였던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으며 1명은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 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은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 이들은 전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이었으며 [[납북 일본인|북한까지 오게 된 경위는 불분명]]했다. 다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등과 연계하여 일본 동해 연안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당한 일본인은 해마다 있었고 [[김일성]] 사후 북한 측의 일본 공작 활동은 급감했다.], 20여 명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 측은 이를 거부해 왔지만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 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7월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 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라며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 북송|수년 전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수많은 재일 한국인을 북송시킨 것에 대해 일본 정부를 마음놓고 깔 수 있게 되었고]][* 북한이 '''자기가 한 말도 번복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북송이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질을 구출한 곳은 한국 김포공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범들에 대한 한국 측의 대처는 당시 일본의 큰 호감을 샀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은 대학생들에게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고 하니 대다수가 위치를 몰라 애먹을 정도로 아예 한국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6.25 전쟁]]으로 특수를 누린 일본이기에 그 정도는 인식할 뿐이었다. 때문에 테러범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는 '''"휴전 중인 나라에다 군사정변도 있었다니 그냥 다 쏴 죽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간단한 방법으로 테러범을 속이려 들었고 그것이 먹히지 않았을 때도 무차별 무력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 측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승무원을 제외한 인질 전원이 한국에서 풀려나게 되어 이것이 일본 측의 호감을 샀다. 이 점은 이후 한일간 외교 교섭에서도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요도호 탑승자 중 한 명이었던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는 1911년생으로 일본에서는 요도호 사건 관련 방송에 당시 피랍된 기내의 상황 설명에 증언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7년 7월 18일 '''만 105세로''' 사망했다. [[http://www.japantimes.co.jp/news/2017/07/18/national/shigeaki-hinohara-japans-centenarian-doctor-st-lukes-dies-105|#]] 성인병 전문가로 일본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책도 많이 쓰고 감투도 많이 썼다. 84세였던 1995년에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성누가병원[* 일본어로는 '세이로카'(聖路加)로 표기한다.]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당시 개방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 인질로 북한에 갔던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국민들을 위해 북한의 인질로 간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당연히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요도호 기장과 함께 엄청난 국민영웅 수준의 환대를 받으면서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게 되었으며 이른바 '인질 대신(身代わり大臣)'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지도를 얻었다. 물론 고위직이라 목숨까지 희생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적어도 수 개월간 인질 생활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 영구 억류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처음 야마무라 차관과 조종사들을 북한에 억류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여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이후 딱 한 차례의 선거를 빼면 당선되는 등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농림수산성]] 대신(장관), 현재의 [[국토교통성]]의 교통부에 해당하는 운수성 대신도 지내고 중의원 당선도 되고 예산위원까지 하며 잘 나가다가 1992년 외교사절로 재[[방북]]을 하루 앞둔 때 [[정신질환]]을 앓았던 차녀의 칼에 찔려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 오히려 그녀를 후계자로 삼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정신이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이상에 의한 살인이라 책임능력 부족을 이유로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둘째 딸은 1996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야마무라 가문의 정치가로서의 생명은 끊기고 말았지만 그의 비서였던 지츠카와 유키오(実川 幸夫, 1943년 10월 14일~)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의지를 이어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